용산철거민살인진압규탄 아카이브 V :: '88만원 세대'론은 정말 20대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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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국내도서>경제경영
저자 : 박권일,우석훈
출판 : 레디앙 200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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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20대다. 20대 후반이지만, 20대다. 그리고 88만원보다 더 못벌고 산다. 따지고 들고, 약간 더 벌때도 있지만, 40만원을 벌 때도 있으니 평균에 근사한 상태다. 앞으로는 더  소득이 나아질수도 있고, 낮아질수도 있어서, 내가 언제까지 평균 88만원의 소득일지는 모르겠다. 다만 최근 1년, 그리고 향후 1년은 이 평균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 스스로 '88만원 세대론'이라는 방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시된 이 '세대론'을 바탕으로 <88만원 세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보자면, 과연 이게 20대를 위한 책인가, 과연 20대에게 도움이되는 이야기인가 의아하다. '88원 세대론'이 가장 허탈한 것은,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20대 본인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68년생 어른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글이 가진 논리에서 보자면,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20대에서 스스로 나왔든, 윗세대로부터 나왔든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20대 본인이 아닌 선배 386세대가 말한다는 발화지점이 갖는 효과에 대해서는 염두하지 않을수가 없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386이 20대에게 '왜 너희는 운동 안하냐'를 "벗어나" 88만원 세대론으로 '20대는 20대의 이야기를 하라'라고 하지만, 이 또한 386이 제시해준 프레임으로 20대는 이제 20대가 되는 것이니, 온전한 '스스로의 20대'인지 의문스럽다.

저자 우석훈씨의 의도가, 매우 충만하게 '20대를 위한' 본심에서 나와 이런 88만원 세대론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88만원 세대론이 순수하게 20대에게만 '몰래' 메신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용어가 다시 다른 386, 다시 다른 세대가 20대를 호명하는 용어가 된다는 점은 저자의 20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과는 무관하게 충분하게 예고되는 상황이다. 아니 그리고 이미 <88만원 세대>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2년 사이의 간격에 이것은 작동하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 정작 이에 속하는 20대는 이 말을 어쨌든 모두 알고 있지만 이것이 우석훈씨의 의도처럼 20대가 움직이는 힘은 아니다. 보다 큰 공포, 보다 큰 좌절, 혹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미래라는 막연한 낙관론 속에서 이 말을 소비하는 경향이 20대에서는 지배적이라고 나는 느껴진다. 사실 그 보다 '88만원 세대'를 의욕적으로 쓰는 것은 非20대있는 세대들, 특히 과거의 운동의 경험을 가진 386들이다. 이제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도 되어 있고, 논술선생, 학원선생,  벤처창업 등으로 사회에 나아간 386등의 세대들이 20대와 마주하는 순간에 의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88만원 세대'이다.

이것은 우석훈씨가 88만원 세대라는 하나의 프레임을 제시한 의도와 함께 고려해야 할, 이 프레임의 효과인데, 정작 20대인 내가 느끼기에 88만원 세대론이라는 프레임은 386이 20대를 불러들이기위한 하나의 호명 장치로서, 그리고 이로써 동시에 386 자신들의 '(우석훈씨가 말한) 잔인함'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나는 정신분석학을 잘 모르긴 하지만, 일전에 지젝이라는 학자가 발언한 내용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지젝에 따르면 우리가 아프리카 난민에게 기부금을 보내는 행위는 그것(아프리카 난민)이 나의 삶과 무관하게 되길 바라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지젝의 이런 분석은 내가 보기에 '88만원 세대'론에도 적용되는데, 우석훈씨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 말은 386이 20대의 문제가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욕망을 발현할 수 있으며, 실제로 당위적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석훈씨는 20대 위의 선배를 잔인하다고 규정하고, 20대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20대의 선배들에게 더욱 구미가 당기는 말이라는 것이다.

20대에게 적용되는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돌아와 보더라도, 우석훈씨가 20대에 말하는 상상력이라는 것도 '386방식이거나 386방식이 아니거나'라는 앞의 전제가 놓이게 된다. 얼마 전에 새로 시작한 미국 드라마 <하우스 시즌6>의 한 에피소드에는, 아직 복귀하지 않은 하우스 박스를 대신해서, 포어맨이 수장이 되는데, 포어맨은 하우스처럼 생각하다 오판하고, 다시 하우스처럼 안 생각안하다가 오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에피소드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하우스가 몰래 제보한 진단으로 치료한다는 것이다.)

포어맨에게 하우스라는 판단의 틀이 전제되는 한 이것은 상상력의 영역이 아닌 것처럼, 88만원 세대라도 非20대가 제시한 프레임은, 우석훈씨가 20대가 상상하고 자기 발언을 하기 바라는 것과 무관하게,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렇게 '안' 생각하거나 하는 판단의 틀이 된다.

때문에 나는 우석훈씨의 20대에 대한 본심과 무관하게, 그의 좋은 의도good intention는 사실 순진한 의도 "good" intention라고 생각한다.

<88만원 세대>나 <혁명은 이처럼 조용히>나 비판하는 이유의 중요한 다른 축은, 내가 느끼기에 우석훈씨에게 이게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가 정말 20대를 위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저작으로서의 효과를 염두한 활동을 한다면, 어른들은 '잔인하다'라고 하고 20대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속한 그 잔인한 어른의 세계, 386의 세계를 저작으로서 비판하는 작업을 '2년' 간격으로 하는게 더 20대를 위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대가 상상하고 주장한다는게, 그냥 내가 속한 세대를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오히려, 어른 세대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반성을, 20대가 아닌 그 세대에 속한 사람이 해준다면 이것이야 말로 20대 상상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계기가 아닐까.

20대인 내가 운동권에 대한 추억은 386의 모순적인 현실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자신들의 공과에 대한 깊은 분석과 반성없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안을, 새로운 아침과 함께 자기도 새롭게 이야기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것을 20대가 말한다면 소모적인 세대논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386에 대한 386에 의한 통렬한 분석과 반성이 "2년"마다 반복되는 저작이 (굳이 세대론으로 접근한다면) 88세대에게는 절실하다고 느끼며 산다.

다시 큰 전제로 돌아가, 20대에 대해 非20대가 무언가 말을 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말 걸기가 정말 본연의 효과가 있을려면 말 거는 사람이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신뢰를 회복하기위해서는 깊은 분석과 반성이 '먼저' 필요한 것아닐까. 이 전제를 놓고 볼 때 우석훈씨의 어른들의 '잔인하다'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다른 버전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왜 굳이 20대론의 프롤로그를 우석훈씨는 쓰고 싶어 하는 것일까, 굳이 세대론으로 접근한다면 386세대에 대한 에필로그로 자신의 세대를 고백하는 저작활동이 '먼저' 아닐까.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Posted by archive V